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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START UP?/ESSAY

A-B-A' 그리고 <어느 광고인의 고백>



A-B-A', 인생의 프레임워크

저는 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A-B-A'라는 구조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A-B-A'는 고전음악의 형식 중 하나로, 세도막 형식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A로 시작해, A와 매우 대조되는 B로 넘어갔다가, 다시 A를 재현하는 형식이죠.


하지만 B를 거친 다음에 재현되는 A는 결코 최초의 A와 같지 않습니다.

전 이것을 하나의 서사 구조로 이해합니다. 전문적인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만...


A - 충동적이고 미성숙하며 어설픈 생각과 행동.

B - 전혀 다른 세계에서의 경험, 여행과 모험.

A' - 성숙, 깨우침,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감.


이 일련의 과정을 저는 일종의 영웅 서사로 멋대로 생각하는 것이죠.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 채, 무지하고 충동적인 상태에서 성숙으로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

전혀 다른 곳에서의 경험과 학습으로 뭔가를 깨닫고 본디 있어야 할 곳으로 회귀하는 것.


연극으로 치면 1막, 2막, 3막입니다.


일종의 프레임워크입니다만, 실용적인 가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난 발걸음을 되돌아보고, 나의 현재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좋죠.

서론이 따분한 데다 길었네요. 어쨌든 오늘은 이 구조에 대한 저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A, "이건 오길비가 아니야"

데이비드 오길비의 <어느 광고인의 고백>을 18살에 읽고 신문방송학과 계열의 진학을 결정했습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제 미래에 대해 저 스스로가 내린 최초의 결정이었고, 그만큼 미숙한 결정이었죠.

현실감 제로의, 터무니없이 이상적인 무언가를 기대해 버리고 말았던 겁니다.


운 좋게도 저는 꽤 괜찮은 학교의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선배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은 저의 치솟은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2000년대 후반 한국에서 광고쟁이를 한다는 건 데이비드 오길비와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어렴풋한 기억으로, 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실망을 했었어요.

1. 텍스트가 지고, 이미지가 부상하면서 카피라이터의 역할이 조정되었다는 것

2. 클라이언트의 숨막히는 요구사항에 많은 경우 크리에이티브가 구속된다는 것


두 개를 써 놓고 보니 당연한 것에 뭘 그렇게 실망했을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10년도 더 된 이야기, 저는 10년 전의 최규형이 아니기 때문이겠죠.

그 때의 제겐 현실과 부딪히거나 전혀 다른 길을 모색하는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전 전혀 다른 길을 모색했죠. 연극 대본을 쓰는 극작가가 되자는 결심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21살의 제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스스로 내린 두 번째 결정이었습니다.



B, "이건 내가 아니야"

저는 이중전공으로 문예창작학과를 선택하고, 군 전역 후 조치원에서 1년을 보내게 됩니다.

다양한 글을 읽고, 생각하고, 여러 형식의 글을 쓰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는 나날들이었죠.

소설과 희곡을 직접 쓰는 수업에서 A학점 이상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학기가 끝나자 희곡 교수님께서 런던 RADA에서 유학한 연출가를 소개시켜 주셨고,

그 자리에서 제가 수업 때 작성한 세 페이지 짜리 초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만남이 있고 나서, 저는 영국 런던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게 되죠.


명목상의 어학연수를 듣던 중, 연출가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보여드렸던 초고를 1시간 분량으로 작업해서 무대에 한 번 올려보자는 제안이었죠.

파트타임 잡을 하나만 남기고, 방구석에서 또는 런던 곳곳의 카페에서 글을 썼습니다.


국제전화 또는 이메일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으며 대본을 만들어 나갔어요.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작업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잡다한 일들을 했습니다.

축구경기 암표를 팔러 다니기도 했고, 숙박시설 침구정리와 청소를 하기도 했죠.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날이 꽤나 쌀쌀해 졌을 무렵 공연이 올라갔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부끄러운 대본이었습니다. 가족, 친구에게 떳떳이 보여줄 수 없을 정도로.

공연이 성황리에 잘 끝났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그 뒤로 연락은 끊겼습니다.


한인식당에서 소주와 안주거리들을 사놓고 청승맞게 나홀로 뒷풀이를 했어요.

힘겹게 글을 토해내면서 전 저라는 인간의 밑바닥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 번 정도야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평생 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행복을 주는 종류의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란 걸 알았거든요.


21살부터 26살까지의 여정을 마무리하기 위한 정리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남은 돈을 모아서 프랑스 여행을 다녀왔고 익숙한 런던의 거리들을 마지막으로 걸었습니다.


런던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더 이상 그곳에서의 생활이 전혀 낯설지 않게 되었을 때,

전 도심의 유휴공간에서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공연하는 어떤 플랫폼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공책에 되는대로 적기 시작했어요.


지금처럼 사업이나 창업을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긴 꿈에서 깨어나 진짜 현실세계에 부딪혀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1년이 조금 못 되는 런던 생활을 정리하고, 전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A', "BEST OF ME"

그 이후의 여정은 제가 저를 소개하는 커리어패스 그 자체입니다.

27살에 게임사 사업부에서 첫 발걸음을 뗐고, 데이터를 공부했고, 스타트업에 다니고 있죠.

그로스 해커가 되기 위한 커리어 체인지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구요.


서른이 되어 그로스 해커가 되려는 최규형은 다시 <어느 광고인의 고백>을 꺼내들었습니다.


영국 태생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호텔 요리사, 오븐 방문판매원, 갤럽 연구원 등을 거쳤으며,

38살에 광고계에 입문해 광고계의 전설이 된 그의 이력이 새삼 새롭게 읽혔습니다.


그가 호텔 주방에서 경영의 기본을 학습했다는 대목에서도 저의 경험이 겹쳐 읽혔습니다.

-파이썬 객체지향 개념을 대본 속 세계와 그 안의 등장인물이라는 구조로 이해했던 것

-피치덱의 설득 플로우란 본질적으로는 이야기의 구성을 짜는 것과 같음을 이해했던 것


또, 제가 저 자신의 특징적인 가치관이라고 생각했던 건 그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이해했습니다.

리더는 상사에게 도전하고 주장을 굽히지 않는 능력자들을 하나로 모아 움직이게 하는 사람이며,

최고의 결과물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때로 녹슬지 않은 스킬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 등이죠.


오길비는 놀랍게도 이런 이야기들도 했더군요.

> 네가 진심으로 믿는 것을 광고해라.

광고하려는 장점이 실제 장점이 아니라면, 고객과 계약을 끊어 버려라.

> 광고는 재미를 주려고 만드는 게 아니라 팔려고 만드는 것이다.

> 흥미롭고 과학적인 조사결과와 팩트를 포함해라.


저는 12년 전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오길비의 말은 울림이 됩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지금 제가 가진 가치관 일부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도 깨닫게 되죠.


그로스 해킹의 "해킹"은 오길비 시대의 "크리에이티브"와 결국 같은 게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기술적, 데이터 측면의 비중이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실행론, 방법론이 달라졌을 뿐.


쉽게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마법같은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시대가 마케터에게 바라는 마법은 좀 더 복잡해졌지만 결국 본질은 같은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며, 오늘의 긴 에세이를 마칩니다.